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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리] 자살한 영혼, 때로는 눈먼이가 보는 이를 위로하였다.
    가톨릭이야기/가톨릭신학 2018. 12. 17. 21:11

    언론 기사 하나가 국제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Maison Hullibarger라는 젊은이가 자살을 했고,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부모들이 디트로이트 대교구에 도움을 요청 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장례식에 파견된 LaCuesta 신부로 부터 비롯됩니다.


     LaCuesta 신부는 장례식에서 반복적으로 힐버거가 자살 했다는 사실을 언급했고, 자살은 죄이며, 끝내는 그가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들어갈 정도로 회개했을지 의문이라는 거의 폭언에 가까운 강론을 했고 이것이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디트로이트 대교구는 공식으로 사과 했고, 이 사제는 본인이 적합하게 직무를 수행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필요한 도움을 받겠다는데 동의 했다고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LaCuesta가 비록 인기 없는 발언을 했을지라도 교회의 입장에 부합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자살의 책임이 경감될 수 있는 상황이 있으며, 자살한 영혼의 구원에 대해 절망하지 말라고 공식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282-2283항) 아울러 1983년에 개정된 교회법은 자살자에 대한 미사를 전면 금지한 원칙을 폐지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LaCuesta 신부는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자살을 죄로 규정한 교회의 전통은 5세기 부터 시작됩니다. 마치 아직도 소녀 복사를 거부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듯이, 이 기나긴 전통으로 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저런 행동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오랜 전통이 곧 복음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으로는 성직주의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제로서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고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때라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LaCuesta 신부는 교회의 본질적 가르침을 무시 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가 선생의 자리에 있다고 해서, 그가 아는 모든 것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교구의 사목 능력입니다. 재교육이 필요한 사제를 자살한 가족을 위한 미사에 보냈다는 것은 디트로이트 교구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종종 벌어지곤 합니다. 관심도 없고 경험도 없는 일에 배치된 사제와 수도자들이 자신에게나 혹은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비교해 보면 Maison Hullibarger의 가족이 보여준 품위 있는 태도는 훨씬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교회를 믿었고, 교회의 권위주의에 굴복하지 않고 사제의 잘못을 지적하고 저항하는 길을 선택 했습니다. 다른 가족들에게는 상처를 입힐 수 없게 하기 위해 책임을 묻겠다는 자세는 존중 받아 마땅합니다. 


    전통에 대한 집착, 정확하게 말하면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내가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태도는 사실 미국 어느 곳의 신부님만이 겪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겪는 것이지요. 문득 조선시대 실학자였던 최한기 선생의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이 때로는 눈은 있지만 마음이 눈먼 사람 보다는 나은 경우가 있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 되지 말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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